봉사하는 마음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여 자기소개서 작성하기
사회 봉사의 역군이 되고자
이제 행여 저의 어린 날의 꿈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혼신의 열정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역군이 됨은 물론, 이 회사를 국내의 톱 기업으로서가 아니라 적어도 국제적인 굴지의 기업으로 발전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어, 더 많은 사회 봉사의 길을 열도록 전력 투구할 각오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성장했습니다. 특히 저희 집이 귀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국민학교에서부터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를 등하교 때마다 귀사 앞을 지나며 하늘 높이 치솟는 웅장한 귀사 사옥 빌딩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귀사가 저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비단 귀사의 웅장한 사옥에 압도당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는 귀사의 웅장한 외형 못지않게 알찬 내실(內實)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의 외삼촌이 오랫동안 귀사에 봉직해 온 덕분에 어릴 때부터 귀사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을 들어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미 정년 퇴직한 외삼촌의 손을 잡고 귀사 사옥 내부를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때, 사옥 내부의 으리으리한 시설에 새삼 감탄하면서 더욱이 분주하게 오가는 사원들의 얼굴에 한결 같이 넘쳐나는 밝은 미소와 예절 바른 몸가짐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휴게실에서 외삼촌이 사주시는 맛있는 과자랑 우유를 먹고 있던 저는 문득 벽에 걸린 큼직하게 쓴 붓글씨의 액자에 시선이 갔습니다. 그러나 주로 한자(漢字)로 쓰여 있어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외삼촌이 저의 표정을 읽으셨는지, 빙긋이 웃으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건 우리 회사의 경영 방침이다. 내용은 우리 회사(會社)는 기업 (企業)을 통하여 사회(社會)에 봉사(奉仕) 한다. 그렇게 쓴 거다.”
저는 조금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사업을 한다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고, 또한 돈을 버는 것은 회사가 부자가 되기 위함일 터인데, 어떻게 사회에 봉사한다는 것일까고 말입니다. 외삼촌이 또 설명해 주었습니다.
“물론 회사가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지. 그러나 회사가 돈을 많이 벌면 회사가 더욱 커지고, 회사가 커지는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게 되니까 그만큼 사회에 혜택을 주게 되는 거지. 또한 회사가 돈을 벌어 더 좋은 기계를 사다가 더 좋고 싼 물건을 만들게 되면, 그것 역시 모두에게 도움을 주는 게 되지 않겠냐. 그뿐만 아니지, 돈을 벌어 병원이랑 학교를 세우는 것도 사회에 대한 봉사지."
저는 비로소 의문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럼 외삼촌도 이 회사에서 일하니까 사회에 봉사하는 거네요?"“물론이지."
“그럼 저도 크면 이 회사에 들어와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이 될 터에요.”
“암, 좋지 좋아. 핫하하..…."
외삼촌은 너털 웃음을 웃었지만, 저의 결심은 확고했고, 그날의 굳은 다짐은 무럭무럭 자라 오늘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쓰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행여 저의 어린 날의 꿈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혼신의 열정으로 사회에 봉사하는 역군이 됨은 물론, 이 회사를 국내의 톱 기업으로서가 아니라 적어도 국제적인 굴지의 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어, 더 많은 사회 봉사의 길을 열도록 전력 투구할 각오입니다.
손해 본다는 정신으로
저는 그때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손해쯤 아랑곳하지 않던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내가 손해 본다는 마음을 가질 때, 모두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고귀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삼대독자(三代獨子)로 태어났습니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 그것도 아버지가 사십대를 바라보면서 저를 보셨기 때문에 문중에서는 일대 경사라고 떠들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태어나 금지옥엽(金枝玉葉) 계란 다루듯이 키워진 저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제 말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저의 사고와 행동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의 일입니다. 유치원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국민학교 시절에도 저의 말이면 거의가 다 제 뜻대로 통하던 것이, 중학교에 들어가고서 부터는 하나 둘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런 제동에 심술과 고집을 부렸고, 심지어는 학우들과 싸움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별로 이렇다 할 운동을 한 것도 없는 저였기 때문에 힘으로는 상대를 이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심통과 고집을 관철하려고 코피가 터지면서도 대들었고, 나중에는 손위의 육촌형까지 동원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들었습니다.
결국 저에게는 '심통'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이러한 어리광스러운 생활은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좀처럼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스런 일입니까. 이는 사회 생활이란 결코 혼자만의 생활이 아니며, 개인주의 내지는 개인의 자유란 정해진 사회 규법(社會規範)의 룰 안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기초적인 가정 교육이 에게는 결여돼 있었던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그릇된 사고와 행동에 일대 전기를 가져오게 된 것은 대학을 나와 군에 입대하고서의 일입니다.
어느날 비가 억수로 퍼붓는 밤이었습니다. 우리 분대 (分隊)는 특수임무를 띠고 긴급 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로 행군하는 도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한 폭우로 계곡이 범람하여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낮도 아닌 칠흑 같은 밤중이라 그냥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쪽 뚝과 저쪽 뚝에 로프를 연결하여 그것을 의지하고 건너야 했습니다. 문제는 누가 로프를 연결하느냐였습니다. 목숨을 건 위험 천만한 일이라 감히 나서는 대원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대원이 있었습니다. 평소 말이 적고 '병아리'라는 별명을 듣던 분대원 중 가장 왜소한 친구였습니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주저의 빛도 없이 로프를 어깨에 메고 물살을 헤치며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비쳐 주는 희미한 회중전등의 불빛을 따라 몇 번인가 물 속에 곤두박질을 해 가며..… 이윽고 건너편 언덕에 다다러 큰 나무에 로프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용기와 희생 정신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손해쯤 아랑곳하지 않던 저는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동시에 내가 손해 본다는 마음을 가질 때, 모두 함께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고귀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앞으로 귀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회사 전체의 화합과 이익을 위해 내가 손해 본다는 희생 정신으로 열과 성의를 다할 결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