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념을 바탕으로 작성한 자기소개서의 예

Milk_Tea 2022. 3. 25. 20:13

자신의 목표와 신념을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 면접관들에게 보다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여러가지 명언들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보자.

 

◎ 성공은 목적이 아니다.

청년들아, 야망을 가지라 !! 누군가가 이런 멋진 충고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야망이 성공으로 도래하건 한갓 야망으로 끝이 맺어지건 나는 그것을 먼저 생각지 않겠다. 한 마리의 개미가 한 알의 보리알을 물고 담벼락을 오르다가 예순 아홉 번을 떨어지더니, 일흔 번째에 목적을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회복하여 드디어 적과 싸워 이긴 옛날의 용사 이야기를 해 주신 국민학교 은사 말씀이 나의 기억에서 살아지지 않는 한 …

나는 입사를 꿈꾸는 사회 초년병이다. 사업 경영을 운위할 경험도 경륜도 없다. 그러나 내가 배운 이론적인 경영 이념을 나름대로 정리함으로써 자기 소개를 대신하고자 한다.

현대의 경영 이념이란 말하자면 기업의 존재 이유와 경영의 목적,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한 기본 사고 (基本思考)일 것이다. 이 경영 이념은 경영의 기술력, 판매력, 자금력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경영 이념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은 기업은 인력(人力)이나 기술 그리고 자금이 아무리 풍부하다 해도 발전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업주가 처음부터 뚜렷한 경영 이념을 가지고 기업 경영에 나서기도 어렵다. 구멍 가게로부터 시작해서 대기업가로 성공한 입지전적 (立志傳的) 인물들의 성공도 있기 때문이다.

경영 이념이라고 아직 말할 수 없는 상태의 어떤 회사의 경영 기본방침을 생산자 측으로서 보자면 그것은 생산자의 사명감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생산자의 생산 활동이 종업원들의 노동력에 또는 기계에만 의해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 활동 그 자체에 기업주의 정신이 살아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우 그 기업주의 경영 정신을 기업혼(企業魂)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업혼, 그것은 물론 기업의 성공을 향해 가는 성취욕구의 에너지로서 목적이 아닌 결과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일찍이 플로베르는 「성공은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끄는 「고리오 할아버지」라는 작품에서 「내 청춘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아직도 푸르게 개어 있다. 위대해지고 싶다. 또 돈을 벌고 싶다는 희망은, 거짓말을 하며, 허리를 굽신거리고, 아첨하기를 스스로 결심한 것이나 다름 없지 않느냐 말이다. 거짓을 말하고, 허리를 굽신거린 자들의 머슴이 되기를 스스로 결심한 것이 아니냐 말이다 — 싫다.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고매하고 청순하게 일하리라. 밤낮 없이 일을 해서 나의 근면 노고만으로써 성공을 잡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성공이라면 얼마나 찬양할 만한 성공이겠는가.

기업의 성공이 물론 이렇게 찬양받을 만한 기업혼, 즉 기업 경영의 이념으로써 성취된다면 그 기업이 속한 국가, 사회의 성공은 보장되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주어져 기업의 종사원으로 출발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중대한 생각에 대해 지금까지 평소에 생각해 온 점을 정리한 셈이다. 그러니까 나는 장차 평사원에서 기업의 경영자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아, 야망을 가지라!

누군가 이런 멋진 충고를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나 나의 야망이 성공으로 도래하건 한갓 야망으로 끝이 맺어지건 나는 그것을 먼저 생각지 않겠다.

한 마리의 개미가 한 알의 보리알을 물고 담벼락을 오르다가 예순아홉 번을 떨어지더니, 일흔 번째에 목적을 달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회복하여 드디어 적과 싸워 이긴 옛날의 용사 이야기를 해 주신 국민학교 은사 말씀이 나의 기억에서 살아지지 않는 한.…..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밟는 모든 진로를 혼자서 다 걸어갈 수는 없다. 성공은 오직 한 길에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성실한 경영 이념은 그런 성실한 인생 경영 이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다.

 

 

◎ 악수(握手)의 커뮤니케이션

토론자로 참가한다면 우선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과 문제 해결에 대한 열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의 열성이란 무의미한 겸손이나 회피성 침묵을 일삼지 않는 솔직하고 예의바른 자기 주장을 뜻합니다. 이러한 태도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질문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토론의 성과는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 있는 가장 불가피한 조건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로 엮어지는 소위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일 것입니다. 특히 직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동료 간이건 상하 간에 건 절대적인 인간 관계의 조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먼저 업무상의 토론 경우를 들어 나의 소견을 개진해 봅니다. 토론자로 참가한다면 우선 토론자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과 문제 해결에 대한 열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때의 열성이란 무의미한 겸손이나 회피성 침묵을 일삼지 않는 솔직하고 예의바른 자기 주장을 뜻합니다. 이러한 태도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질문과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면 토론의 성과는 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과 대립된 의견이 제기됐을 때 위압적인 언사나 감정 노출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점에 도달할 때까지 토론을 진지하게 이끌어 가는 태도가 긴요하다는 뜻입니다. 토론 그 자체는 열띠게 진행되더라도 토론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화기애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셋째로는 남의 발언을 바르게 경청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발언의 허리를 자르는 무례한 태도는 자신의 올바른 주장을 관철할 수도 없으려니와 토론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결과가 됩니다. 따라서 남의 발언을 바르게 끝까지 경청하는 아량이야말로 대인다운 도량이 아니겠는지요.

이렇게 커뮤니케이션은 대화를 통한 토론의 장에서 이른바 지식 산업으로 생산력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문화 창조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대화로만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서양에서 유입된 인사법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악수도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일 것입니다.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끼리 악수를 나눈다면 그것은 화해(和解)나 정의(情誼)를 뜻하는 것이고, 상대방과 악수를 나누지 않고 헤어지는 회담이라면 그것은 결렬을 뜻할 것입니다.

악수의 유래가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보면 악수의 커뮤니케이션은 매우 바람직한 인간 관계나 사태를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 악수라는 것이 때때로 인간의 위선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어 고소(苦笑)를 금치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모임에선가 A와 B는 만나자마자 반갑다는 듯 서로 손을 잡은채 한 동안 악수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직후 나는 그들을 따로 떨어진 장소에서 만나 역시 악수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영락없이 서로를 좋지 않게 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악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의 위선은 그와 같은 악수의 몇 십 몇 백배를 넘는 죄악적인 것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일상의 악수 커뮤니케이션부터서라도 인간적인 정의가 담긴 따뜻한 것으로 만들어 가는 직장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최초의 만남도 그리고 헤어짐의 순간도 악수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면, 악수의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동의 신성성(神聖性)

세계 제1의 강철 대왕 카네기는 노동 쟁의는 임금 문제 하나만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의 존재와 복지와 그들의 성취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노동의 신성함과 고귀함에도 홀대받는 곳에 노동 쟁의와 같은 파행성 노사 관계가 야기된다는 극명한 경험 철학일 것입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나는 / 새벽 쓰린 가슴에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 아 / 이러다간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 가지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 우리들의 분노 /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 새벽 쓰린 가슴에 / 차가운 소줏잔을 /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 노동자의 햇새벽이 / 솟아오를 때까지

귀사(貴社)에 입사하고자 이 자기 소개의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문득 박노해 시인의 시 「노동의 새벽, 몇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까닭은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한 마디로 노동의 신성함이랄까 고귀성에 있습니다.

노동(勞動)이라는 말조차 이젠 이데올로기의 때가 묻고 자칫하면 어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격앙된 행동 양식을 떠올릴 수도 있는 명사가 됐지만, 「노동」이란 고귀하고 신성한 인간의 근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도 그야말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입에서 어느 날 갑작스럽게 튀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요즘 말로 사용자가 근로자의 노동력 생산성(生産性)> 제고를 위해서 사탕발림삼아 만들어낸 말도 아닙니다.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노동의 신성성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봅니다. 그는 목공 요셉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손바닥에는 굳은 못 자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대패질과 톱질과 망치질로 어린 그의 목덜미로는 땀방울이 줄지어 흐른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존귀한 왕이 되었으나 어린 시절 피땀 흘려 노동하였습니다.

나는 그 어린 노동자의 모습을 새벽마다 나의 이웃 아파트 주차장에서 보곤 합니다. 노동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홀어머니가 아파트 주민들의 승용차 세차를 하는 새벽마다 어머니를 도와 세차 일을 하고 등교 시간 임박해서야 학교로 달려가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광경을 보고 「저런 어린 것까지……」 또는 「몇 푼이나 번다고..…」식의 측은한 동정심, 필요 이상의 동정심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생각인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동의 존엄성을 몸에 익히며 불로 소득이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을 통해 배우도록 하는 서구 선진국 국민성을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선 안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자기 소개의 글을 통해 내 자신의 노동 이력을 굳이 상술하려 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노동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 젊은 한 때를 걸어 온 저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노동의 신성성과 고귀함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는 어려움이며 노동의 고통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제1의 강철 대왕 카네기는 노동 쟁의 (勞動爭議)는 임금 문제 하나만으로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 종업원의 존재와 복지와 그들의 성취감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노동의 신성함과 고귀함이 홀대받는 곳에 노동 쟁의와 같은 파행성 노사 관계가 야기된다는 극명한 경험 철학일 것입니다. 카네기는 근로자에게도 경고했습니다.

— 타인(他人)의 종속자(從屬者) 되기를 그만 두는 최선의 길은 「철저하게 타인의 종속자 근로자>가 됨에 있다.

카네기의 이 아포리즘 중에 「철저하게」라는 말의 뉴앙스는 바로 노동의 신성성과 고귀함이 아니겠는지요.